지구로부터 수십억 광년 떨어진 우주 어딘가에, 우주의 빅뱅에서 비롯된 원광이 계속 뻗어 나가며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있습니다. 이와 극명하게 대조적으로, 지구에서 발생한 또 다른 형태의 전자기 복사인 The Lucy Show의 첫 실황 방송 전파는 진폭이 크게 감소했지만 먼 우주 어딘가에서 첫 화를 방송하고 있습니다.
두 사건의 기본 개념은 모두 빛의 속도(그리고 다른 형태의 모든 전자기 복사)와 관련이 있습니다.
과학자들이 철저히 조사한 빛의 속도는 이제 방정식에서 기호 c라는 상수 값으로 표현됩니다. km로 나타내면 시간당 300,000km에 달하는 빛의 속도는 진정한 상수 라기보다는 진공 상의 최대 속도이며, 매체를 변경하거나 양자 간섭을 통해 조작할 수 있습니다.
균일한 물질, 즉 매체에서 이동하는 빛은 굴절, 반사, 회절 또는 다른 방식으로 교란되지 않는 한 비교적 일정한 속도로 직선으로 전파됩니다. 이렇게 잘 확립된 과학적 사실은 원자시대나 르네상스의 산물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 학자 에우클레이데스가 기원전 350년경에 획기적인 논문인 광학의 서에서 처음으로 주장한 것입니다. 그러나 빛(그리고 기타 전자기 복사)의 강도는 이동한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합니다. 따라서 빛이 주어진 거리의 2배를 이동한 후에는 강도가 4배 감소합니다.
공기를 통해 이동하는 빛이 유리나 물과 같은 다른 매체에 들어가면 빛의 속도와 파장이 감소하지만(그림 2 참조) 주파수는 변하지 않습니다. 빛은 굴절률이 1.0인 진공 상태에서 초당 약 300,000km로 이동하지만 물에서는 초당 225,000km(굴절률 1.3, 그림 2 참조), 유리에서는 초당 200,000km(굴절률 1.5)로 느려집니다. 2.4의 다소 높은 굴절률을 가진 다이아몬드에서 빛의 속도는 상대적으로 굼뜨며(초당 125,000km), 이는 진공 상태의 최대 속도보다 약 60% 낮습니다.
빛이 은하계 사이의 우주 공간(그림 1 참조)과 우리 은하 내에서 이동하는 엄청난 여정 때문에 별 사이의 공간은 킬로미터가 아니라 빛이 1년 동안 이동하는 거리인 광년으로 측정됩니다. 1광년은 9조 5천억 킬로미터 또는 약 5조 9천억 마일에 해당합니다. 지구에서 태양 다음으로 가장 가까운 별인 프록시마 센타우리까지의 거리는 약 4.24광년입니다. 이에 비해 우리 은하의 지름은 약 15만 광년으로 추정되며, 안드로메다 은하까지의 거리는 약 221만 광년입니다. 이는 221만 년 전 안드로메다 은하를 떠난 빛이 천체에 반사되거나 파편에 굴절되어 가로막히지 않는 한, 지구에 막 도착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천문학자들이 밤하늘을 바라볼 때는 현재의 시간, 머지않은 과거 그리고 고대 역사의 혼합물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선구적 바빌로니아인, 아랍 점성가, 그리스 천문학자가 별자리를 기술한 기간에 전갈자리(전갈자리에서 점성술사까지)에는 여전히 전갈의 채찍꼬리가 있었습니다. 이 별자리에 있는 꼬리별과 그 외 다른 별들은 기원전 500년에서 1000년 사이에 하늘에서 신성으로 나타났지만 오늘날의 별 관측자들에게는 더 이상 보이지 않습니다. 지구의 밤하늘에서 관찰되는 별 중 일부는 사라진 지 오래지만, 그 형상을 전달하는 광파는 여전히 인간의 눈과 망원경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별의 파괴로 인한 빛(그리고 그 부재에 따른 어둠)은 시간이 모자라 아직 깊은 우주의 엄청난 거리를 돌파하지 못한 것입니다.
기원전 450년경에 살았던 아크라가스의 엠페도클레스는 빛이 유한한 속도로 여행한다고 추측한 것으로 기록된 최초의 철학자 중 한 사람입니다. 거의 천년 후인 서기 525년경 로마의 학자이자 수학자인 아니키우스 보이티우스는 빛의 속도를 기록하려고 시도했지만 반역과 마법 혐의로 기소된 후 과학적 열의의 대가로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중국에서 폭죽과 신호에 흑색 화약을 처음 적용한 이래로 인류는 빛의 속도에 대해 의구심을 품어왔습니다. 빛과 색의 섬광이 폭발음보다 몇 초 앞서 있기에, 빛의 속도가 분명히 음속을 초과함을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폭약 뒤에 숨겨진 중국의 비밀은 13세기 중반에 서방으로 전파되었으며, 빛의 속도에 대한 의문도 함께 따라왔습니다. 이 시기 이전에 다른 조사자들은 번개가 친 후에 천둥이 울리는 것을 생각해 보았을 태지만, 지연의 성질에 대한 그럴듯한 과학적 설명은 내놓지 못했습니다. 아랍 학자 알하이삼은 빛의 속도가 유한하다고 제안한 최초의 본격적인 광학 과학자(서기 1000년경)였으며, 서기 1250년에 접어들자 영국의 광학 선구자인 로저 베이컨은 빛의 속도는 매우 빠르지만 유한하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 대다수의 과학자들은 빛의 속도가 무한하며 측정할 수 없다는 의견을 고수하고 있었습니다.
1572년, 덴마크의 유명한 천문학자인 튀코 브라헤는 카시오페이아자리에서 발생한 초신성을 최초로 기술했습니다. "새로운 별"이 갑자기 하늘에 나타나 18개월 동안 서서히 밝아졌다가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본 후, 천문학자는 혼란스러웠지만 흥미를 느꼈습니다. 이 새로운 천체의 환상으로 인해 브라헤와 동시대 사람들은 빛의 속도가 무한하면서 완전하고 불변한 우주라는 널리 통용된 개념에 의문을 품게 되었습니다. 16세기에 소수의 과학자들이 빛의 속도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지만, 빛의 속도가 무한하다는 믿음을 바꾸기는 어려웠습니다. 1604년에 비로소 독일의 물리학자 요하네스 케플러는 빛의 속도가 순간적이라고 추측했습니다. 그는 공간의 진공이 빛의 속도를 늦추지 않는다고 출판된 메모에 덧붙이며, 공간을 채우고 빛을 운반한다는 에테르에 대한 동시대 사람들의 탐구에 약간의 훼방을 놓았습니다.
망원경이 발명되고 나서 비교적 조잡하게 개선된 직후, 덴마크의 천문학자 올레 뢰머(1676년)는 빛의 속도를 추정하려고 애썼던 최초의 과학자였습니다. 뢰머는 목성의 위성인 이오(Io)와 그 빈번한 식을 연구하여 식의 주기를 예측할 수 있었습니다(그림 3). 그러나 몇 개월 후 그는 자신의 예측이 시간 간격이 점차 길어지며 서서히 정확도가 떨어지고 약 22분의 최대 오류에 도달한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해당 시간 범위에서 빛이 이동하는 거리를 고려하면 22분은 다소 큰 불일치입니다. 이상하게도 그의 예측은 그 후 몇 달에 걸쳐 다시 더 정확해졌으며 주기는 반복되었습니다. 파리 천문대에서 근무하면서, 뢰머는 행성의 궤도 경로로 인한 지구와 목성 사이의 거리 변화 때문에 관측에 차이가 생겼음을 곧 알게 되었습니다. 목성이 지구에서 멀어짐에 따라 빛이 이동하는 거리가 더 길어지고 지구에 도달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뢰머는 지구와 목성 사이의 거리에 이 시기의 비교적 부정확한 계산을 적용하여 빛의 속도를 초당 약 137,000마일(또는 220,000km)로 추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림 3은 빛의 속도에 대한 분석 방법을 설명하는 뢰머의 원본 그림을 재현한 것입니다.
뢰머의 연구는 과학계를 뒤흔들었고 많은 연구자들은 무한한 빛의 속도에 대한 기존 추측들을 재고하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어, 아이작 뉴턴 경은 획기적인 1687년 논문인 Philosophiae Naturalis Prinicipia Mathematica(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에서 이렇게 기술했습니다. “빛이 연속적으로 전파되고 태양에서 지구까지 이동하는 데 약 7~8분이 걸린다는 것이 다른 천문학자들의 관찰에 의해 확인된 목성 위성의 현상으로 인해 이제 확실해 졌습니다.” 이것은 실제로 정확한 빛의 속도에 놀랍도록 근접한 추정치입니다. 뉴턴의 권위 있는 의견과 널리 퍼진 명성은 과학 혁명을 시작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빛의 속도가 유한하다고 주장하게 된 과학자들이 새로운 연구를 시작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빛의 속도에 대한 유용한 추정치를 낸 사람은 영국 물리학자 제임스 브래들리였습니다. 뉴턴이 사망한 지 1년 후인 1728년, 브래들리는 항성 광행차를 사용하여 빛의 속도를 진공 상태에서 초당 약 301,000km로 추정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태양 주위의 지구 공전으로 인해 별의 위치가 명백하게 변화함에 따라 나타납니다. 항성 광행차의 정도는 지구의 공전 속도와 빛의 속도의 비율로 정해질 수 있습니다. 항성 광행차 각도를 측정하고 그 데이터를 지구의 공전 속도에 적용함으로써, 브래들리는 놀랍도록 정확한 추정치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만화경의 발명가이자 음향학의 선구자인 찰스 휘트스톤 경은 1834년에 전기의 속도를 측정하려고 시도했습니다. 휘트스톤은 8마일에 달하는 와이어로 스파크의 움직임을 생성하고 측정하기 위해 라이덴 병을 통해 회전하는 거울과 잔류전압을 활용하는 장치를 발명했습니다. 불행히도, 휘트스톤의 계산은(그리고 아마 장비에도) 전기의 속도를 초당 288,000마일로 추정할 정도로 오류가 심했고, 그는 이 실책으로 인해 전기가 빛보다 빠르게 움직인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휘트스톤의 연구는 훗날 프랑스 과학자 도미니크 프랑수아 장 아라고에 의해 확장되었습니다. 1850년에 시력이 감퇴하기 전까지 연구를 완료하지는 못했지만, 아라고는 빛이 공기보다 물에서 느리게 이동한다고 올바르게 추정했습니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라이벌 과학자인 아르망 피조와 장 베르나르 레옹 푸코가 아라고의 발견을 이용하고 휘트스톤의 회전 거울 기기 설계를 확장하여 빛의 속도를 천체에 의존하지 않고 측정하려고 했습니다. 1849년에 피조는 톱니바퀴(회전 거울 대신)로 광선을 비추고 5.5마일 떨어진 곳에 고정된 거울을 비추는 장치를 설계했습니다. 그는 바퀴를 바깥쪽으로 빠르게 회전시키면서 두 톱니 사이의 틈을 통해 광선을 제어할 수 있었고, 인접한 틈에서 반사되어 돌아오는 광선을 포착할 수 있었습니다. 바퀴 속도와 빛의 파동이 이동한 거리를 확보한 피조는 빛의 속도를 계산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빛이 물보다 공기 중에서 더 빨리 이동한다는 것도 발견했으며(아라고의 가설 확인), 이는 동포인 푸코가 나중에 실험을 통해 확인한 사실입니다.
푸코는 빛의 속도를 측정하기 위해 압축 공기 터빈으로 빠르게 회전하는 거울을 사용했습니다. 그의 장치(그림 4 참조)에서는 좁은 광선이 조리개를 통과한 다음 미세 눈금이 있는 유리창(빔 스플리터 역할도 함)을 거쳐 빠르게 회전하는 거울에 충돌합니다. 회전하는 거울에서 반사된 빛은 그에 상응하는 크기의 증가 없이 기구의 경로 길이를 약 20미터로 늘리는 일련의 지그재그 패턴 고정 거울로 전달됩니다. 빛이 일련의 거울을 통해 반사되어 회전하는 거울로 되돌아오는 데 걸리는 시간 동안 거울 위치가 약간 틀어집니다. 그 후, 회전하는 거울의 틀어진 위치에서 반사된 빛은 새로운 경로를 따라 광원과 기기에 장착된 현미경으로 되돌아갑니다. 현미경을 통해 빛의 미세한 이동을 보고 기록할 수 있습니다. 푸코는 실험에서 수집한 데이터를 분석하여 빛의 속도를 초당 298,000킬로미터(초당 약 185,000마일)로 계산할 수 있었습니다.
푸코의 장치에서 빛의 경로는 공기 이외의 매체를 통한 광속 측정에 활용될 만큼 충분히 짧았습니다. 그는 빛의 속도가 물이나 유리에서 공기의 약 2/3에 불과하다는 것을 발견했으며, 주어진 매체를 통과하는 빛의 속도는 굴절률에 반비례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놀라운 결과는 수백 년 전에 빛의 전파에 관한 파동 이론에서 빛의 성질에 대해 이뤄진 예측과 일치합니다.
푸코의 선례를 따른 앨버트 A. 마이클슨이라는 폴란드 태생의 미국 물리학자는 마이컬슨은 측정 방법의 정확도를 높이려고 시도했으며 1878년 잉글랜드의 세번 강 둑에 늘어선 2,000피트 길이의 벽을 따라 더 정교한 버전의 장치를 사용하여 빛의 속도를 성공적으로 측정했습니다. 마이컬슨은 고품질 렌즈와 거울에 투자하여 푸코가 사용한 것보다 훨씬 더 긴 경로에 걸친 광선의 초점을 맞추고 반사였고, 최종 결과를 초당 약 30마일의 오차 범위를 허용한 초당 186,355마일(초당 299,909킬로미터)로 계산했습니다. 실험 설계가 더욱 정교해졌기 때문에, 마이컬슨의 측정 정확도는 푸코의 것보다 20배 이상 높았습니다.
1800년대 후반에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빛이 에테르라고 하는 운반 매체를 사용하여 공간을 통해 전파된다고 여전히 믿었습니다. 마이컬슨은 1887년에 과학자 에드워드 몰리와 힘을 합쳐,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할 때 빛의 속도가 상대적으로 변화하는 것을 관찰하여 에테르를 감지하는 실험적 방법을 고안했습니다. 그들은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복잡한 거울 배열을 사용하여 길이가 각각 10미터가 넘는 두 개의 다른 경로를 통해 광선을 분할하고 개별 광선을 다시 유도하는 간섭계를 설계했습니다. 마이컬슨과 몰리는 지구가 에테르 매체를 통해 이동한다면 에테르의 흐름의 수직 방향에서 앞뒤로 반사되는 광선이 에테르에 평행하게 반사되는 광선보다 더 멀리 이동해야 한다고 추론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 광선이 간섭을 통해 재결합될 때 감지할 수 있는 광선 중 하나에 지연이 발생하게 됩니다.
마이컬슨과 몰리가 만든 실험 장치는 거대했습니다(그림 5 참조). 천천히 회전하는 5피트 이상 넓이, 14인치 두께 정사각형 석판에 장착된 이 기기는 지구의 진동을 배제하기 위해 마찰이 없는 완충 장치 역할을 하는 수은 웅덩이로 받쳐 단단히 보호되었습니다. 일단 슬래브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시간당 10회전의 최고 속도를 달성한 후 다시 정지하는 데 몇 시간이 걸렸습니다. 빔 스플리터를 통과하여 거울 시스템으로 반사된 빛에 간섭 무늬가 있는지 현미경으로 검사했지만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이컬슨은 간섭계를 사용하여 빛의 속도를 초속 186,320마일(초당 299,853km)로 정확하게 측정했으며, 이는 향후 25년 동안의 표준 값이 되었습니다. 빛의 속도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던 마이컬슨-몰리 실험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이론으로 20세기 초에 마침내 사그라들 에테르 논쟁 종식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습니다.
아인슈타인은 1905년에 특수 상대성 이론을 발표하고 1915년에 일반 상대성 이론을 발표했습니다. 첫 번째 이론은 서로에 대해 일정한 속도로 물체가 움직이는 것과 관련된 반면, 두 번째 이론은 가속도와 중력과의 연결에 중점을 둡니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아이작 뉴턴의 운동 법칙과 같은 오랜 가설에 도전했기 때문에 물리학에 있어 혁명 세력이었습니다. 상대성 이론은 물체의 속도가 관찰자의 위치에 대해서만 결정될 수 있다는 개념을 구현합니다. 예를 들어, 여객기 내부를 걷고 있는 남자는 항공기의 기준틀(시속 600마일로 움직이고 있음)에서 시속 약 1마일로 이동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지상의 관찰자에게 그 남자는 시속 601마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인슈타인은 두 기준틀 사이를 이동하는 빛의 속도가 두 위치의 관찰자에게 동일하게 유지된다고 계산을 통해 가정했습니다. 한 기준틀에 있는 관찰자는 빛을 이용하여 다른 기준틀에 있는 물체의 위치와 속도를 판단하기 때문에, 빛은 관찰자가 물체의 위치와 속도를 관련 지을 수 있는 방식을 변경합니다. 아인슈타인은 이 개념을 사용하여 한 기준틀에 있는 물체가 첫 번째 기준틀과 균일하게 움직이는 다른 기준틀에서 볼 때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설명하는 몇 가지 중요한 공식을 도출했습니다. 그의 결과는 물체의 상대 속도가 빛의 속도에 근접할 때만 효과가 눈에 띄게 되지만 몇 가지 특이한 결론을 이끌어 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기본 이론과 자주 언급되는 상대성 방정식인
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물체의 속도가 증가함에 따라 물체의 길이는 관찰자에 비해 감소합니다.
기준틀이 이동할 때는 시간 간격이 짧아집니다. 다시 말해, 빛의 속도나 그와 비슷하게 이동하는 우주 여행자는 몇 년 동안 지구를 떠났다가 불과 몇 개월의 시간 경과를 경험하고 돌아올 수 있습니다.
움직이는 물체의 질량은 속도에 따라 증가하고 속도가 빛의 속도에 가까워질수록 질량은 무한에 가까워집니다. 이러한 이유로 무한한 질량을 가속하려면 무한한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빛의 속도보다 빠른 이동은 불가능하다고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물리학계 전체에 영향을 미쳤지만 빛을 연구하던 과학자들에게 특히 중요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이 이론은 마이컬슨-몰리 실험이 예상한 결과를 도출하지 못한 이유를 설명하고, 운반 매체로서의 에테르의 성질에 대한 중대한 과학적 연구의 진척을 좌절 시켰습니다. 또한 진공에서 빛의 속도보다 빠른 것은 없으며 이 속도는 일정하고 변하지 않는 값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한편, 실험 과학자들은 빛의 속도에 대한 정확한 값을 목표로 삼고 측정 오류를 줄이기 위해 점점 더 정교한 도구를 계속해서 적용했습니다.
날짜 | 연구자 | 방법 | 추정한 초당 킬로미터 |
---|---|---|---|
1667 | 갈릴레오 갈릴레이 | 덮개를 씌운 랜턴 | 333.5 |
1676 | 올레 뢰머 | 목성의 위성 | 220,000 |
1726 | 제임스 브래들리 | 항성 광행차 | 301,000 |
1834 | 찰스 휘트스톤 | 회전 거울 | 402,336 |
1838 | 프랑수아 아라고 | 회전 거울 | |
1849 | 아르망 피조 | 회전 바퀴 | 315,000 |
1862 | 레옹 푸코 | 회전 거울 | 298,000 |
1868 |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 이론적 계산 | 284,000 |
1875 | 마리 알프레드 코르누 | 회전 거울 | 299,990 |
1879 | 알베르트 마이컬슨 | 회전 거울 | 299,910 |
1888 | 하인리히 루돌프 헤르츠 | 전자기 방사선 | 300,000 |
1889 | 에드워드 베넷 로자 | 전기 측정 | 300,000 |
1890년대 | 헨리 롤런드 | 분광학 | 301,800 |
1907 | 에드워드 베넷 로자와 노아 도시 | 전기 측정 | 299,788 |
1923 | 앙드레 메르시에 | 전기 측정 | 299,795 |
1926 | 알베르트 마이컬슨 | 회전 거울(간섭계) | 299,798 |
1928 | 아우구스트 카롤루스와 오토 미텔슈테트 | 커 셀 셔터 | 299,778 |
1932~1935 | 마이컬슨과 피즈 | 회전 거울(간섭계) | 299,774 |
1947 | 루이스 에센 | 공동공명기 | 299,792 |
1949 | 칼 I. 아슬락손 | 쇼랜 레이더 | 299,792.4 |
1951 | 키스 데이비 프룸 | 전파 간섭계 | 299,792.75 |
1973 | 케네스 M. 이벤슨 | 레이저 | 299,792.457 |
1978 | 피터 우즈와 동료들 | 레이저 | 299,792.4588 |
19세기 후반에는 라디오와 마이크로파 기술이 발전하여 빛의 속도를 측정하는 새로운 접근 방식이 되었습니다. 뢰머의 선구적인 천체 관측으로부터 200년 이상 지난 1888년, 독일 물리학자인 하인리히 루돌프 헤르츠는 전파의 속도를 측정했습니다. 헤르츠는 초당 300,000km에 가까운 값을 내며 전파와 빛이 모두 전자기 복사의 형태라는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의 이론을 입증했습니다. 1940년대와 1950년대에는 영국 물리학자인 키스 데이비 프룸과 루이 에센이 전자기 복사의 속도를 보다 정확하게 측정하기 위해 라디오와 마이크로파를 각각 사용하여 또 다른 증거를 수집했습니다.
맥스웰은 측정이 아닌 수학적 추론을 통해 빛의 속도와 기타 형태의 전자기 복사를 정의한 것으로도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는 변화하는 전기장이 자기장을 생성한다는 사실을 전기와 자기 사이의 연관성을 찾는 연구 도중에 이론화 했는데, 이는 패러데이 법칙의 역 추론입니다. 맥스웰은 전자기파가 진동하는 전기파와 자기파의 결합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제안했고, 공간을 통한 이러한 파동의 속도를 다음과 같이 계산했습니다.
여기서 ε은 유전율이고 μ는 자유 공간의 투자율인데, 이는 상당히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는 두 가지 상수입니다. 결과는 측정된 빛의 속도에 매우 근접합니다.
1891년, 마이컬슨은 빛의 속도와 천문학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면서 캘리포니아의 리크 천문대에서 굴절 망원경으로 대규모 간섭계를 만들었습니다. 그의 관찰은 별처럼 멀리 있는 물체를 볼 때 빛의 도착 시간이 지연되는 것을 기반으로 했으며, 이를 정량적으로 분석하면 천체의 크기와 빛의 속도를 모두 측정할 수 있습니다. 약 30년 후, 마이컬슨은 자신의 실험을 마운트 윌슨 천문대로 옮겨 당시 세계에서 가장 컸던 100인치 망원경에 동일한 기술을 적용했습니다.
마이컬슨은 8각형 회전 거울을 실험 설계에 포함하여 초당 299,845km의 빛의 속도 값에 도달했습니다. 마이컬슨은 실험이 완료되기 전에 사망했지만, 마운트 윌슨 천문대의 동료였던 프랜시스 G. 피즈는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 1930년대까지 혁신적인 기술을 계속 도입했습니다. 피즈는 변형된 간섭계를 사용하여 몇 년에 걸쳐 수많은 측정을 수행했고 마침내 정확한 빛의 속도 값이 초당 299,774km임을 확인했는데, 이는 그 당시에 가장 근접했던 측정치입니다. 그로부터 몇 년 후인 1941년에 과학계는 빛의 속도에 대한 표준을 확립했습니다. 이 값은 초당 299,773km로, 그 당시의 가장 정확한 측정값 모음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그림 6은 지난 200년간의 광속 측정값을 그래프로 나타낸 것입니다.
1960년대 후반에 접어들자 레이저는 매우 명확한 주파수와 파장을 갖춘 안정적인 연구 도구가 되었습니다. 1958년에 키스 데이비 프룸이 마이크로파로 진행한 실험의 접근 방식과 유사하게 주파수와 파장을 동시에 측정하면 매우 정확한 빛의 속도 값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곧바로 명백해 졌습니다. 미국 및 기타 국가의 여러 연구 단체는 아이오딘으로 안정화된 헬륨-네온 레이저에서 633나노미터 라인의 주파수를 측정하여 매우 정확한 결과를 얻었습니다. 1972년 미국 국립표준기술연구소는 레이저 기술을 사용하여 초당 299,792,458미터(186,282마일/초)의 속도를 측정했으며, 이는 궁극적으로 빛의 속도에 대한 매우 정확한 추정을 통해 미터를 재정의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뢰머가 1676년에 행한 획기적인 시도를 시작으로 100명 이상의 연구자들이 다양한 기술을 사용하여 빛의 속도를 최소 163회 측정했습니다(표 1의 방법, 연구자 및 날짜 참조). 빛의 속도는 17세기에 뢰머가 했던 계산 이후로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과학적 방법과 장치가 개선됨에 따라 추정치의 오류 한계가 좁아졌습니다. 최초의 본격적인 측정 시도 후 300여 년이 지난 1983년, 제17차 국제 도량형 총회에서 빛의 속도는 초당 299,792.458km로 정의되었습니다. 따라서 미터는 1/299,792,458초마다 빛이 이동한 거리로 정의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많은 과학적 계산에서 조차) 빛의 속도는 초당 300,000킬로미터(또는 186,000마일)로 반올림됩니다. 빛의 속도에 대한 표준 값으로의 도달은 전 세계의 과학자들이 데이터와 계산을 비교할 수 있도록 하는 국제 단위 시스템을 확립하는 데 중대한 기여를 했습니다.
빛의 속도가 빅뱅 이후로 느려지고 있다는 증거의 유무에 대해서 약간의 논란이 있습니다. 빅뱅 시기에는 일부 연구원들이 제안한 대로 빛이 훨씬 더 빠르게 이동했을 수 있습니다. 주장의 제시와 반박이 이 논쟁을 끊임없이 지속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여전히 빛의 속도가 일정하다고 주장합니다. 물리학자들은 뢰머와 그의 후임자들이 측정한 실제 빛의 속도는 크게 변하지 않았음을 지적하며, 빛의 속도를 규정하는 데 사용된 측정의 정밀도 증가와 관련한 과학 장비의 꾸준한 개선을 대신 지목합니다. 오늘날 목성과 지구 사이의 거리는 태양계의 지름과 행성의 궤도 궤적과 마찬가지로 정확도가 매우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연구자들이 이 데이터를 적용하여 지난 몇 세기 동안 이루어진 계산을 개정하면, 보다 현대적이고 정교한 기기로 얻은 값과 사실상 비슷한 빛의 속도 값을 도출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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